유월항 (Yoo Wol-Hang): Aug 13, 1926 – Oct 26, 2018

She was born in August 13, 1926, Moon-mak, Gangwon Province (South Korea), as the eldest of four siblings.  Her father ran a successful business of transport and warehousing along the Han river.  Known as a child prodigy, she won a top academic award in her Gangwon Province, and was offered a scholarship to study in Japan.  Worried about sending a young girl abroad, however, her father forbade her from taking that opportunity. Around 1941, she enrolled 京城第二公立高等女學校(currently 首都女子高等學校), which was at that time a top high school for a Korean girl, as 京城第一公立高等女學校 was reserved for Japanese expats (under its colonial rule).  After graduation, she started her job at the Bank of Joseon (later became Bank of Korea).  At the bank, she worked for foreign exchange and treasury divisions, among others. While working for the bank, she also completed a college degree at Seoul Yangje Hakwon (which later became Myongji University).

Soon, she would witness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and Korean Independence in 1945 as a 19 year old girl, and 5 years later in 1950, the Korean war.  In the beginning of the war, she was trapped in Seoul and had to go to work at the Bank now controlled by the North Korean force. Under the mounting pressure from communists, however, she left her work one day and escaped to her home town, Moon-mak.  After the Restoration of Seoul on September 28, 1950, she made a daring return back to her job in Seoul hiding in the back of the Bank truck which was carrying new currency notes as part of the 1950 currency reform.  Like many in her generation, she witnessed horrors of the war.  I had been told a number of times about the tragic loss of her close cousin, Yoo Tae-jin. Forced into the North Korean militia, he suffered a leg injury during a U.S. air-raid, and contracted a tetanus, which ultimately proved fatal, for a penicillin couldn’t be obtained in time despite all-out efforts by her and her family.

After the January 4th Retreat from Seoul in 1951, she and her family escaped to Daejeon.  She reported to work at the Daejeon Branch of the Bank of Korea.  During this time, she met my father.  Their marriage was arranged by my great uncle.  By all accounts, there was little courtship. My father used to tell me that he went to the Bank to check her out; he found her so little (which I interpreted as really “cute”) that he felt that he could almost put her in his pocket.  My mother’s first impression: he looked manly and trustworthy.  They married on February 3, 1953.  Soon after, she was pregnant of her first child and had to quit her job.  She now joined my father’s extended family in Shim-cheon, Youngdong-gun, Chung-cheong buk-do.  

Her life as newly-minted bride was hardly glamorous.  She had to care for a big family, including a grand-mother-in-law, mother- and father-in-laws, as well several siblings of my father.  When my father moved to Daejeon for his job, my mother followed him.  In time, she would have four children, a boy, a girl, a girl, and a boy.  Their well-being and success would soon become the central purpose of her life. Meanwhile, she bravely embraced the extra-ordinary sacrifices imposed on her to care for her ailing grand-mother-in-law and then later her mother-in-law until both passed away.  

Fast forward to the adulthood of her children.  In the mid-80s, my parents and my older brother’s family relocated near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in Seoul.  She enjoyed early morning walk in its stadium, learning harmonica, which she performed in several concerts with her friends; she also enjoyed learning line dancing, Enka (Japanese songs) and Taoism.  She had a life-long passion for gardening, in particular, tending for a variety of flowers, cacti, and fruit trees.  She was also a life-long lover of animals; we had at different times two dogs, birds, chickens, exotic fishes, and bunnies; she would put out food at her garden for stray cats. 

Through her life, she was genuinely loyal to her family and friends, and a fierce advocate of her four children. The central focus and purpose of her life was to do all she could to make sure that her children become happy, healthy and successful.  Accomplishing that goal and seeing her 6 grand children thrive were her greatest joy and fulfillment.  In 2016, she would see the arrival of her first great-grand daughter, whom she doted on immensely.  

Until the last day, she was full of energy, had a clear sense of judgement and opinion on matters, and yet was remarkably open-minded and unfettered by the constraint of her time, convention or prejudices.  Above all, she had an unparalleled love, kindness, and understanding.  For all of these and more, she will be deeply missed by all whose lives she touched.  I am already missing her smile, conversations, and our regular Saturday lun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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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1926 8 13 강원도 문막에서 4남매 첫째 딸로 태어 났습니다. 어머니의 부친께선 한강을 이용한 물류, 창고, 운송사업을 하셨습니다.  어렸을 부터 공부잘하고 총명하여 강원도지사상을 받고 일본 유학의 기회를 얻었으나, 부친의 반대로 고향에 남기로합니다. 1941 , 어머니는 경성 2공립 고등여학교(현재 수도여자 고등학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한국여학생이 갈수 있는 최고 명문이었다 합니다. (참고로 경성 1공립 고등여학교는 일제하에 일본시민으로 입학이 제한 되었음.) 졸업후 어머니는 조선 은행 (나중에 한국 은행이 )에서 취직하였습니다. 은행에선 외환 국고업무를 담당 하셨고.  은행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양재학원 (나중에 명지대학교가 )에서 대학을 수료하셨습니다.

1945 어머니는 19 소녀로 해방을 맞이하고, 5년후인 1950년엔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한강다리 폭파로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한 어머니는 북한치하의 은행에 출근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수록 선전과 의용군 참여를 종용하는 공산당의 압박에 못이겨 은행을 그만두고 문막으로 귀향합니다.  1950 9 28 서울수복후, 어머니는 서울 한국은행에 복귀합니다.  과정이 극적인데, 아직 남한이 완벽히 수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화폐를 실어나르던 은행트럭에 숨어서 귀환 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화폐개혁으로 새로운 화폐를 유통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시대의 많은 분들처럼 전쟁의 상흔을 갖고 계셨습니다.  가까운 사촌인 태진의 죽음을 오랜기간 안타까와 하셨지요.  그분은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 미군 공습때 다리를 잃고 파상풍으로 고생 하시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페니실린이 있었더라면 살렸을 텐데, 어머니가 백방으로 구하려다녔다는 말씀 여러번 들었습니다.

1951 1.4 후퇴 , 어머니와 가족은 대전으로 피난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한국은행의 대전지점에서 (당시 본점이 이동했다고 추정됨)에서 근무를 시작 하였지요. 기간 동안,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중매 하셨는데, 당시는 만혼으로 여겨져 사귀는 기간없이 바로 결혼 하셨던 같습니다.  나중 말씀인데, 아버지가 은행에 가셔서 모른척하고 어머니를 훔쳐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첫인상은 어머니가 너무 귀여워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어머니의 아버지의 인상은 믿음직스런 호남형이었다구요. 두분은 1953 2 3일에 결혼하게 됩니다.  , 어머니는 아이를 갖게되어 직장을 그만 두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충북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에 정착하게됩니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새신부의 삶은 녹록치 만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 그리고 시동생들을 포함하는 대가족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곧이어 아버지가 대전에 새직장을 구하게 되어서, 어머니는 대전에 새롭게 가정을 꾸미게 됩니다. 그리고 저희 남매의 어머니가 되셨지요. 그후부턴 저희 사 남매의 복지와 성공이 어머니의 최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치매를 앓고 계신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셨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장성한 .  80년대 중반에, 아버님과 어머니는 저희 형님 가족과 함께 서울교대근처로 이주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손자들을 돌보고, 교대에서 아침마다 산책 하셨지요. (돌아가시는 아침에도 산책을 하셨습니다.) 근처 복지관에 가셔서 하모니카, 라인댄싱, 엔카등를 배우셨습니다.  하모니카는 항상 그러 하셨듯이 열심히 연습하여, 친구 분들과 몇차례 공연도 하셨습니다.  집안에서는 주역공부에 몰두하셨습니다.  평생, 정원의 , 나무, 채소를 기르는데 열정적 이었습니다.  어린시절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를 키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동물들을 좋아하셔서, 토끼, 강아지, , 십자매, 열대어등과 저희 어린시절을 보낼 있었습니다.

평생 모든이들을 신의와 의리로 대하셨고.  무엇 보다도, 자식들의 행복, 건강, 그리고 성공에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남매가 번창하고 여섯 손자 손녀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머니의 가장 기쁨이었습니다. 2016 10, 어머니는 첫번째 증손녀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어머니께선 마지막 가시기 전날까지도, 분명한 사고 분별과 견해, 그리고 시대와 편견에서 자유로운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셨습니다.  물론, 무한한 사랑과 다정함이 그분 영혼의 중심에 있었구요.  어머님과 두런두런 나누던 대화, 그리고 우리들만의 토요일 점심이, 벌써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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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3)

  1. In Choi

    훟륭한 어머님을 두셨군요. 마지막까지 건강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건강악화, 치매로 오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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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연성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 4남매를 나아서 키워주신 우리 엄마,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항상 식사 후에는 “맛있게 먹었다”고 하시고, 무엇을 해드리면 “고맙다” 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집에 들릴 때 마다 “엄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드렸어야 하였는데….. 죄송합니다. 엄마, 그립고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작은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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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nonymous

    할머니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언젠가 이런날이 올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아직 실감이 안나고 너무 슬푸네요. 할머니와 함께했던 18/10/21 2시 경의 식사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좋아하시던 비빔냉면 드시고 맵다고 사리도 추가주문 하시고 고기를 좋아하셔서 수육 마지막 한개 할머니가 드셨었어요.
    가족들 사주 노트와 메세지를 보니 할머니꼐서도 어느정도 준비를 하셨지만 아무에게도 내색은 안하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도 긍정적이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해요..
    최윤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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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건행

    고생많았구 어머님에 관한 글 잘 읽었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저녁, 호식이하고 우리 반 집집을 돌면서 찹쌀떡을 팔러 다니적이 있어. ‘찹쌀떡’ 하고 소리치는게 너무 흥분되고 재미 있었어.
    드디어 너 집에도 갔었지. 어머님이 나오셨어. ㅡ지금 어머님의 히스토리를 읽어보니 그 이상일것이라고 생각되는 되는데ㅡ 비행청소년으로 의심받아 충분한 두 학생을 눈앞에 둔 그 순간. 어머님은 우리가 너무 걱정되셨나봐. 잘못 타이르면 더 삐뚤어 질까봐 오히려 더 걱장되는.. . 결국 우리에게 ‘뮈하러 이러고 다녀’ 라면서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주셨지 … 나는 ‘어머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씩 웃으면서 집을 나왔지.

    너무 눈에 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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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안진원

    1학년 때 일본어 같이 공부할 때 격려해주셨던 기억, 방학 때마다 처자를 소개하도록 말씀하셨던 기억 등이 떠오른다 어머님 소개 링크 잘 읽어 보았다 어머님의 사랑이 더욱 승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를 기원한다

    어머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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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황일우

    블로그 글을 읽고 어머님께서 남기고 가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제약이 아니었다면 큰 인물이 되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대신 자녀들에게 자신의 좋은 에너지를 다 베푸신 듯 합니다. 좋은 삶을 사시고 가신 것 같습니다.
    어머님 가시는 길 평안하시기를 다시 한 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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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삼호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식민지, 해방, 분단과 내전, 그리고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한 세대의 삶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세대 언저리의 삶들은 다들 소설같은 파란만장입니다. 교수님을 포함한 훌륭한 자손들을 두신 삶은 어머님께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것이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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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이태휘

    연구야, 우리 어릴적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하기전 겨울방학때 거의 매일같이 너네 집에 갔었지. 큰누님한테 영어공부하러. 40년도 더 넘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밝고 다정하시던 얼굴이 아주 선하게 떠오른다. 또렸하신 목소리도 들리는듯 하고. 추운 겨울날들 이었는데 너네집은 유난이도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던거로 기억한다. 더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멀리있어 가보지는 못하지만, 어머님의 명복을 빈다. – 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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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Qingmin Liu (Post author)

    Very beautiful and touching words, Yeon-Koo. It is amazing how the experience of a single person and family reflects the trajectory of the struggle and the rise of a nation. Your mother’s story was surprisingly similar to that of Inna’s maternal grandma who passed away last year in her 90s. She grew up rich and attended high school (very rare for women at that time). She lost a brother in war, who was a secret member of Korean independent movement in Manchukuo. But unlike your mother, her marriage was kind of a tragedy and none of her children obtained more education than she did because of the cultur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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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김기철

    최연혜 의원님 훌륭한 어머니가 계셨군요
    93세에 돌아가신 어머니(고 유월향 어른)는 천국에 계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 일제때 태어나시고 교육을 받고.조선은행에 취직.. 6.25도 겪으면서 피난처인 대전의 삶 그 격동 속에서도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자녀 즉 최의원님과 형제자매들이 태어나게 된 것…
    어머니들이 다 그렇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보살핌. 교육이 이 지금의 사회.. 이 나라를 만드신 것 같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이젠 모두 고인이시지만 저의 부모님 이야길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고인의 생년리 저의 어머님은 아니지만 아버님 생년과 같고 증손의 생년이 2016년 10월 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네요. 그리고 1953년….
    무엇보다 우리 부모세대의 생애가 자식들을 위한 무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으로 공감이 갑니다.
    특히 글을 잘 정리해서 많은 사람이 알게되는 것도 참 좋은 생각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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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재훈

    옛말에 큰 나무는 큰 그림자를 남긴다는 말이 있는데, 어머님의 훌륭하신 인격과 영재성이 자녀들에게 전해진 것 같군. 어머니는 옆에 계시나 안 계시나 언제나 그립지. 이렇게 글로 남기니 나중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리는데 큰 도움이 되겠어. 어머님을 떠나 보내니 많이 아쉽겠지만 마음 잘 추스리기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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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Erin Cho

    She was a truly extraordinary person, a giving, kind, beautiful, and genuine human being who loved dearly her children and her life. I respected tremendously for her unselfishness, intelligence, wisdom and the capacity to accommodate. She is going to be missed by our families de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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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Roberto

    So moving, Yeon-Koo. Congratulations for having been the child of such wonderful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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